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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칼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故노무현을 생각하다

레몬박기자 2021. 5. 18. 11:41

제가 처음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대 후반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나 한겨레신문을 구독하기 전까지는 이른바 정치 무관심층이었습니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는 지지율이 앞서는 후보를 찍곤 했습니다.

 



제가 대학에 다닌 80년대는 학생운동이 정점을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이었는데도 이념을 떠나 대세에 순응하는 투표를 했으니

학생운동이 퇴보한 지금의 20대들이 보수후보를 지지하는 것도 별반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진보신문은 전무했습니다.
지금의 한겨레신문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철저하게 진보진영을 대변했습니다.
저는 한겨레신문을 구독했고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다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그분의 사저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중에서 누군가가 한겨레신문을 두 손으로 펴서 열렬히 흔들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모습을 보고 너무 감격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한겨레신문은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2002년이었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른바 조직도 배경도 없는 노무현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이인제가 대세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 경선지인 광주에서 기선을 제압한 노무현이 팬클럽인 노사모와

깨어 있는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후보로 선출됩니다.

 



그 후 지지율이 떨어지자 노무현을 흔드는 세력들이 나타납니다.
노무현을 밀어내고 정몽준으로의 후보단일화를 도모하려던 세력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후단협 즉 ‘후보단일화협의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들은 노무현을 후보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노무현이 당선되었을 때도 탄핵의 주요세력이 됩니다.

 

 


노무현이 후단협의 흔들기에 후보 자리를 내놓으려고 할 때 유시민이 분연히 일어납니다.

 

“민주당 반노(反盧)·비노(非盧)그룹의 행동은 국민들에 대한 배신행위이자 사기행위이다. 이 같은 비민주적인 행위에 대해 규탄하고 항의하는 시민·지식인 사회의 목소리를 조직하는 일을 벌일 계획이다.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이다"

유시민은 절필선언을 하며 개혁당 창당에 매진합니다.
노무현이 후보자격을 박탈당했을 때를 대비해 대안정당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날 민주당 인사들과는 형식적으로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곧바로 개혁당 당사를 찾아가 유시민과 뜨겁게 만납니다.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노무현이 탄핵 당했을 때 그리고 노무현이 서거했을 때 흘리던 유시민의 뜨거운 눈물을 말이지요.

 


노무현이 서거한 날 저는 직장에서 승진시험을 치고 있었습니다.
승진시험 중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점심도 회사에서 제공해주었습니다.
휴대전화도 반납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밖의 소식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시험을 치르기 전에 누군가가 감독관에게 질문을 하더군요.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데 사실인가요.”

감독관의 눈이 붉어지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저는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시험을 치렀습니다.
다행히 노무현 대통령이 도와주셨는지 저는 승진시험에 합격했습니다.
3번 만에 합격한 시험이라 정말 기뻤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저에게 주고 가신 마지막 선물이라고요.

 

 

 

노무현이 대통령에서 퇴임하고 봉하 사저에서 지낼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았습니다.
노무현은 손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시골길을 달립니다.
아마 노무현은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후 노무현은 검찰의 조사를 받습니다.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언론은 노무현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기사를 수없이 내보냅니다.
그 유명한 SBS의 논두렁 시계도 그 때 등장합니다.
경향신문의 [이대근칼럼] ‘굿바이 노무현’ 이라는 기사를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집권한 그는 민주화 운동의 인적·정신적 자원을 다 소진했다. 민주화 운동의 원로부터 386까지 모조리 발언권을 잃었다. 그를 위해 일한 지식인들은 신뢰와 평판을 잃었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개혁이든 노무현이 함부로 쓰다 버리는 바람에 그런 것들은 이제 흘러간 유행가처럼 되었다. 낡고 따분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이름으로는 다시 시민들의 열정을 불러 모을 수가 없게 되었다. 노무현이 다 태워버린 재 속에는 불씨조차 남은 게 없다. 노무현 정권의 재앙은 5년의 실패를 넘는다. 다음 5년은 물론, 또 다음 5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었다고 해야 옳다. 이제 그가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이 뿌린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이 서거하자 그동안 노무현을 멸시하고 조롱하고 모욕을 주던 언론사가 일제히 노무현의 서거를 애통해합니다. 물론 국민들의 분노에 일제히 자세를 낮춘 것이지요.

 

저는 지금도 마음이 울적할 때나 뭔가 중대한 결심을 하고자 할 때는 봉하 마을을 찾아갑니다.
저는 봉하 마을에 들를 때마다 정토원도 함께 찾습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보며 그분들의 넋을 위로합니다.

 

 

 

지금까지 60대 남자가 주절주절 여러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다시는 노무현처럼 불행한 대통령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만은 노무현처럼 그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정권재창출이 필수입니다.
이 글을 읽는 (딴지회원) 여러분이 그 선두에 섰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감사합니다.

 
by 국어사전 (이 글은 딴지일보게시판에 닉네임 '국어사전'님이 쓴 글을 허락을 받아 게시합니다. )

* 위 흑백사진은 부산민주화운동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을 제 카메라로 찍은 것이며 

컬러 사진은 고 노무현 대통령 빈소가 있는 봉하마을 장례식장에서 제가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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