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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파장
합천 뇌룡정, 지조를 지킨 학자 남명 조식과 을묘사직소 본문
경상남도 합천에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낸 '뇌룡정(雷龍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뇌룡정은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가다 보면, 입구에서부터 수령이 무려 450년이 된 웅장한 느티나무가 여행객을 맞이한다.
정자로 가는 길목엔 곳곳에 남명 조식 선생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남명 조식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보다 올바른 도(道)를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이었다.
그는 현실의 부패를 날카롭게 비판했고, 뜻을 굽히기보다 자신의 길을 걸었다. 조정에서 벼슬을 내리려 할 때마다 거절했고, 결국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가 남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는 단순한 사직서가 아니라,
시대를 향한 날카로운 경고이자 선비 정신의 표본이었다.
을묘년(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권력을 휘두르던 외척 윤원형이 몰락하자 조정은
남명에게 벼슬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남명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사직소를 올렸다.
그는 당시 조정이 부패했고, 정치를 바로잡을 의지도 없다고 보았다. 관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고 있었으며, 왕조차도 그들을 견제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다"고 선언했다.
을묘사직소에서 남명은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다.
왕이 올바른 정치를 해야 신하들도 바른 길을 따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명종에게 올바른 정치를 할 것을 간곡히 권고하면서도, 자신은 더 이상 그 길에 함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의 사직소는 단순한 사퇴의 변이 아니라, 타협하지 않는 신념의 선언이었다.
그는 평생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산속에서 후학을 길렀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했다.
곽재우, 정인홍, 김면 같은 이들은 남명의 가르침을 받으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을묘사직소는 단순한 글이 아니라, 후대의 행동까지도 변화시킨 정신적 유산이다.
by 레몬박기자
* 위 사진은 페친인 최동호님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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