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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영삼대통령 그의 촌철살인 명어록 71선

레몬박기자 2015. 11. 25. 16:02

김영삼 대통령의 시원시원한 돌직구와 명언, 그의 촌철살인 어록 모음

 

 

김영삼 대통령 리더십을 말한다면  ‘직선적인 감의 승부사’ 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가 왔을 때 에둘러가지 않고 정면돌파하는  ‘거산’이란 호나 ‘대도무문’이라는 사자성어가 어울리는 리더였다. 그는 ‘감(感)의 정치인’이었으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과 고비마다 승부수를 날리는 특유의 감각과 돌파력으로 위기를 극복해가는 난세를 주름잡는 리더십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는 촌철살인의 능력을 가졌고, 명어록을 남겼다.  

 

 

 

 

 

1960-70년대

 

1. “그 신문이 장 총리의 마음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탄압했다면 장 총리는 과거 이 정권에 의해서 경향신문이 폐간당하던 때를 상기하라”  (1961년 3월, 장면 정부의 민족일보 인쇄중지를 비판하며)

 

2. “김대중씨의 승리는 우리들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이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김대중 씨를 앞세우고 전국을 누빌 것을 약속한다.” (1970년 9월 29일,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 패배 직후)

 

3. “한국에는 통치가 있을 뿐이고 정치가 없다. 정치가 없는 곳에 민주주의는 없다.” (1973년 9월 24일, 국회 대정부질문,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규명 촉구하며)

 

4. “역사의 진로를 민주회복으로 바꾸어야 할 시점이 지금이라고 확신하며, 정부는 이제 안보를 빙자해서 억압정치를 할 명분이 없으며, 오히려 안보를 위해서 민주회복을 해야 할 시점에 섰다.” (1978년 7월 23일, 국회 연설)

 

5.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 (1979년 6월 4일, 동아일보 인터뷰. 5·30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6.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 않아서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입니다.”(1979년 8월 11일,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 강제진압 항의 기자회견)

 

7.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 길을 선택할 것”(1979년 10월 4일, 헌정사상 첫 의원직 제명 뒤)

 

8. “순교의 언덕, 절두산을 바라보는 이 국회의사당에서 나의 목을 자른 공화당 정권의 폭거는 저 절두산이 준 역사의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9년 10월4일, 헌정사상 첫 의원직 제명 뒤)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9.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1979년 10월,10.26 뒤 박정희 대통령 청와대 빈소를 찾아)

 

 

 

 

 

 

1980년대

 

10.  “인간 김영삼을 가둘 수 있지만 김영삼의 양심은 가둘 수 없다”(전두환 정권 시절에 가택연금 당했을때 )

 

11.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1983년 5월 29일,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입원)

 

12. “10·26 뒤 나는 대통령이 돼 꼭 4년 단임을 하고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83년 단식투쟁을 통해 대통령을 하겠다는 욕심을 완전히 버렸고, 이런 생각을 버리게 해 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1985년 한국일보 인터뷰)

 

13. “노태우씨는 전두환 대통령과 같은 군인 출신으로서 12·12 사태를 일으켰고, 일선 군부대를 빼내 쿠데타를 한 사람이다. 쿠데타 한 사람이 대권을 잡는 것은 군정의 연장이다.” (1987년 관훈클럽 토론에서)

 

14. “산행 도중에 많은 낙오자도 있었다. 민주화도 이와 같다. 민주화의 길은 그만큼 고행의 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민주화 산행에 있어서 최종 고지의 200m 전방에 와 있는 셈이다.” (1987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15.“대통령 후보 지명은 축제 속에 이뤄져야 한다. 박종철군 사건으로 온 국민이 우울한 지금,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서 하는 대통령 지명대회는 초상집에서 춤을 추는 격이다.”(1987년 6월-국회의사당 단식농성 중 인터뷰에서)

 

16. “100만명이 뭐꼬, 1000만명은 해야지.…누가 세리(헤아려) 보나?”

(1987년 전두환 정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을 벌일 때, DJ가 YS에게 ‘100만인 서명운동’을 제안하자, YS가 역제안 하면서. DJ가 “1000만명을 어떻게 채우느냐”고 하자. ‘1000만명’으로 최종 결정)

 

17.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1987년 12월-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18. “군정을 학실히(확실히) 종식시키겠습니다.” (1987년 대선 유세에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1990년 1월-3당 합당을 하면서 언급한 말)

 

19. “단식 이후 마음을 완전히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설산을 바라보니 더 비워야겠다는 아쉬움이 살아나는 것 같다.”

(1987년 지리산 등반 중 기자회견에서)

 

 

 

 

 

1990년대 <대통령 재임시 (1993~1998)>

 

20.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하다. 눈물과 땀이 필요하다. 고통이 따른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 (1993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21.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1993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22. “명예가 아닌 부를 택하려면 공직을 떠나라.”(1993년 2월27일)

 

23. “정치자금을 단 한 푼도 받지 않겠다. 떡값이 아니라 찻값이라도 받지 않겠다.”

(1993년 3월4일-취임 직후 첫 청와대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에서)

 

24. "인사가 곧 만사다. 머리는 빌릴 수 있다"

(이는 그의 정치 신념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필요한 사람이라면 '삼고초려'도 예사로 여겼다고 한다.)

 

25. “깜짝 놀랬재?”(1993년 3월9일-청와대 수석비서관회에서. 전날 예고없이 김진영 육군참모총장 경질을 시작으로 ‘하나회’ 숙청을 시작하면서)

 

26.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다.”(1993년 5월13일-5·18 특별담화문에서)

 

27. "요즈음 개혁을 하다 보니 환부 하나를 찾아내 도려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32년의 권위주의 시대가 만든 '한국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한다." (1993년 주요 인사 접견에서)

 

28. "군 개혁을 단행해 문(文)은 문답게, 무(武)는 무답게, 문과 무가 각기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1993년 계룡대 국군의 날 기념행사에서)

 

29.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

(1993년, 하나회 척결 등 개혁 반발에 대해)

 

30. "추석 때 떡값은 물론 찻값이라도 받지 않을 것이다."

(1993년 청와대 기자간담회에서 정치자금을 받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면서)

 

31. "새 정부에 있어 국가기강 확립의 대도(大道)는 하나도 윗물 맑기요, 둘도 윗물 맑기다."

(1993년 국가기강확립 보고회의에서 고위공직자의 청렴성을 강조하면서)

 

 

 

 

32. "우째 이런 일이…."(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 아들의 대입 부정과 관련해서)

 

33.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

(1993년 신경제계획 민간위원과의 조찬에서 부동산실명제를 소개하면서)

 

34. "요즈음 개혁을 하다 보니 환부 하나를 찾아내 도려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32년의 권위주의 시대가 만든 '한국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한다."(1993년 주요 인사 접견에서)

 

35.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

(1993년 모범수출업체 대표들과 오찬에서 개혁의 속도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면서)

 

36.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1993년 금융실명제에 관한 특별담화문에서)

 

37. "분노와 저항의 시대는 갔으며, 투쟁이 영웅시되던 시대도 갔다."(1993년 서울대 졸업식 치사에서)

 

38. "아직도 골프를 열심히 치십니까."(1993년 경제5단체장 회식에서)

 

39. "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사랑을 받지만, 또 한편으로는 달리는 기차를 보고도 짖는다. 그러나 개가 짖는다고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1994년 '개의 해' 의미를 되새기며)

 

40. "북한이 무모한 핵개발을 계속하며 서방의 인내를 시험한다면 반드시 자멸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1994년 민주평통 운영위원 접견에서)

 

41. "대통령으로서 정도를 걷고 당당하게 대도를 가겠다." (1994년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서울시 분할론'을 부인하며)

 

42. "지지율이 90%를 넘을 때는 너무 높아서 어지럽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민주국가에서는 반대도 있을 것이니, 이제야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1994년 대통령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43. "보름 후면 남북 정상이 한자리에 모여 민족의 장래를 위해 허심탄회하게 논의키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하면서 아쉽게 생각한다."(19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소식에)

 

44.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났다." (1994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

 

45. "로마제국은 외침이 아니라 내부 부패로 망했다."(1994년 인천 북구청 세무비리 사건에 대한 엄단을 지시하면서)

 

 

 

 

 

46. "태풍을 기다리는 것은 밤에 도둑이 들기를 기다리는 것 같지만, 태풍이라도 와 비가 내렸으면 한다. "

(1994년 극심한 가뭄에 대한 심정을 토로하면서)

 

47. "국민 여러분의 참담한 심경과 허탈감, 정부에 대한 질책과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서 대통령으로서 부덕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1994년 성수대교 붕괴 관련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48. "이번 기회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1995년 한·중 정상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당시 일본 총무상이 “식민지 시절 좋은 일도 있었다”고 한 망언을 겨냥해 일본을 강도높게 비판하면서)

 

49. "저의 임기 중 대통령 중임제 도입이나 정경유착의 온상이 될 내각제 채택을 위한 개헌, 또는 어떤 형태의 개헌도 단호히 반대할 것이다. "(1996년 신한국당 전당대회 치사에서)

 

50. “북한이 국지전을 일으키면 전면전으로 갈 수 있다” (1996년-여야 및 국회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51.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고 여기고 있다.”

(1997년-‘소통령’으로 불리던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자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52. "최 의원 나요, 나. 빨리 일어나야지."

(199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불명인 최형우 의원을 문병하면서)

 

53. "정상에 오르면 반드시 내려갈 때도 생각해야 한다." (1997년 LA다저스 박찬호 선수 가족 초청 오찬에서)

 

54.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습니다.”(1998년 2월 24일, 대통령 퇴임사)

 

55. "국민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1999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회동에서)

 

56. “박정희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남았으며 결코 미화될 때가 아니다”(1999년 5월-시국성명에서. 김대중 정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되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러자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하면 옳다고 주장하고 남이 하는 것은 부정하는 반사회적 성격의 인물이 다시는 정치 지도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김 전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공격했다.) 

 

 

 

 

 

2000년대 ~이후

 

57. “23일간 단식한 사람인데 점심 한끼 굶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2000년 10월-특강을 위한 고려대 방문을 학생들이 가로막자 승용차에서 기다리겠다며)

 

58.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2000년 10월-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소식을 듣고)

 

59.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 (2001년 한나라당 박근혜 부총재를 평가하면서)

 

60. "나도 23일간 단식해 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

(2003년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를 방문해 단식 중단을 종용하면서)

 

61. “일본이 상당히 우경화되고 교만해졌다.”(2005년-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의 예방을 받으면서)  

 

62.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2008년 11월, 우석대 초청 강연) 

 

63. “그렇게 (화해했다고) 봐도 좋다. 이제 그럴 때가 온 것도 아니냐.”

(2009년 8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주일 전 문병 뒤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64.  “나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습니다. 협력도 오랫동안 했고 경쟁도 오랫동안 했습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쏟았습니다.”(2009년 8월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병문안)

 

65. “아쉽고도 안타깝다. 나라의 큰 거목이 쓰러졌다고 생각한다.”(2009년 8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66. “쿠데타 세력이 제일 나쁘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긴급조치로 국민들을 괴롭혔던 것을 다 잊어버린 것 같다.” (2010년 5월 취임 인사차 들른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67.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 (2010년 8·15 때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로 자신과 전두환 전 대통령을 함께 초대하자)

 

68. 이어진 오찬에서 전 전 대통령이 “와인 더 없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술 먹으러 왔나”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69.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별 것 아닐 것”

(2012년 7월-새누리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한 김문수 경기지사가 김영삼 대통령을 예방해 “이번에는 토끼(김문수)가 사자(박근혜)를 잡는 격”이라고 하자 박근혜 의원을 비난하면서. 당시 김 전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70.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흐름과 맞지 않는다”(2012년-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비판하며)

 

71.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몸은 빌릴 수 없다.” (평소 건강관리를 강조하면서)

 

 

 



 



by 레몬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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