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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국민방위군 사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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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국민방위군 사건

레몬박기자의 레몬박기자 2015. 10. 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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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리영희 선생님이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요즘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방사청과 국방부의 군납 군수비리사건을 보면서, 우리 군의 비리사건은 참 역사가 길다는 것을 느낀다. 얼마 전 터져나온 사건들도 모두 '허걱'소리 날만큼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었는데, 이보다 더한 군 비리 사건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승만 정권에서 행산 '‘국민방위군’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명 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을 정도이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어떻게 국가와 사회를 어떻게 무너뜨리고 뒤흔들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1. 국민방위군의 소집

 

1950년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 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북한을 백두산까지 밀어붙였다. 곧 통일이 될 것 같았는데 중국군의 개입에 의해 다시 남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때 이승만 정권은 남쪽의 장정들을 중공군에 의해 빼앗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그해 12월 15일에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수십만에 이르는 국민방위군을 모집되었다.

 

 

 

 

2. 죽음의 행렬

 

이렇게 수십만명의 국민방위군을 모집하였지만 정작 이 군대를 어떻게 훈련시키고, 또 전선에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고, 필요한 예산도 제대로 세워두지 않았다. 당시 작전처장 증언에 따르면 이 엄청난 병력을 후송하는데 쌀, 군복 하나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하라는 것도 없이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작전명령을 육군본부로부터 하달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행군 중 대열 책임자가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하달받은 양곡권을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한마디로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방위군을 이끌고 목적지인 부산으로 강행군을 했지만, 이들은 당시 북한 의용군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무리한 행군을 이어갔다. 게다가 때가 12월이고 그것도 당시까지 유례없는 혹한이었다. 하지만 당시 소집된 장정들은 정부의 책임 하에 소집되었으니 정부가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홑바지와 저고리 차림에 길을 나섰는데, 정작 정부는 이들을 위한 옷값도 배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현금을 주더라도 방한복 50만벌을 구할 길이 없는데 예산은 배정해서 무엇하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군복도 지급되지 않았고, 차량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장정들은 2명당 1장씩 지급된 가마니로 서로의 체온을 의지해 추위를 견뎌야 했으며, 교실 하나에 수백명이 수용돼 서로 몸을 맞대고 자야 했고, 그런 상황에서 질병이 창궐하여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열병으로 수도 없이 죽어갔다. 말 그대로 죽음의 행군이었는데, 문제는 이 행군이 끝난 것으로 국민방위군의 재난이 다 끝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3. 빼돌려진 예산

 

법안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방위대가 약 50만 병력임을 가정, 후방에 50여개의 교육대를 설치해 1개 교육대 당 1만 여명을 수용하려 했다. 하지만 교육대의 기간요원들은 병력이 오더라도 이들을 받아들일 능력도 의사도 없었고, 이에 대한 예산 역시 제대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대 간부 및 장병들은 대부분이 이승만 정부 산하의 극우 테러 단체였던 서북청년회 소속이 합류한 대한청년단 간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나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특히 사령관인 김윤근은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지만 사실은  대한청년단 제3대 단장이자 씨름꾼 출신으로 대한청년단 초대 단장인 신성모의 사위였다.

 

교육대 간부와 장병들은 병력이 죽음의 행군에 필적하는 고생 끝에 도착한 국민방위군을 자기들에겐 수용능력이 없으니 다른 교육대를 알아보라는 식으로 계속 뺑뺑이를 돌리면서 이들을 수용한 것처럼 서류를 날조해 예산을 빼돌렸다. 이런 식으로 빼돌린 예산이 수사당국의 발표로는 24억원, 국회조사단의 주장으로는 50억원 내지 60억원에 달했다.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은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기생들에게 돈을 뿌리고 다녔는데, 그가 100여일 동안에 기밀비 명목으로 쓴 돈만 무려 3억원이었다. 그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감찰위원회(지금의 감사원)의 1년 예산이 3천만원 가량이었으니 이들의 부정부패가 어땠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국민방위군 사령부는 예산 횡령을 위한 한 방편으로 장부상으로 젤리공장 또는 엿공장을 짓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젤리(엿) 공장을  일단 만들어는 두었으나, 생산능력에 비해 소비한 것으로 기록된 쌀의 양이 6배가 넘었고, 자동차 250대를 구입했다더니 20대밖에 사지 않았고, 필요한 재료를 산다고 했지만 장부상 기록한 것의 1% 정도만 구입하였다. 이런 식으로 횡령된 금액 중 상당액이 당시 국회에서 여당 노릇을 하던 신정동지회에 유입되었다고 한다.

 

국민방위대에 할당된 예산은 이런 식으로 윗사람부터 사병까지 다  떼먹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뒤늦게 국민방위군에 할당된 예산에 따라 식량이 지급되었지만 국민방위군 장정들은 하루에 4홉을 배급받았지만 이는 하루 5홉 5작을 받는 전쟁포로들보다 못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굶주린 장정들은 훈련을 빌미로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탈취하고, 잔치집과 굿판을 습격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 빈속에 급하게 먹어서 토사곽란으로 죽은 장정들까지 발생하였다.

 

4. 총 한 번 쏴보지 못하고 죽은 사망자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채 급조한 정책과 이 정책을 수행하는 국방부의 총체적 무능, 그리고 이 사이에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실무진과 그 뒤를 봐주는 정치적 먹이사슬로 연결된 비리로 인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이들 중 상당수가 허무하게 죽어갔다. 이들은 군인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전쟁터에 가서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죽어간 것이다. 정부의 공식기록에는 사망자가 천 수백명 기록되어 있지만, 중앙일보가 간행한 <민족의 증언>에는 50만명의 대원 중 2할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부산일보가 간행한 <임시수도 천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명으로 되어 있다. 안깝게도,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집계하기가 불가능하지만 대충 10만명 정도가 이렇게 사망하였다고 보고 있다.

 

5. 사건에 대한 책임처벌과 정치적 파장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가 되자 사건 수사가 진행되었고, 관련자들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이때문에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자 이승만은 신성모를 국방장관에서 물러나게 하였고, 이기붕을 장관에 임명했으며, 참모총장을 정일권에서 이종찬으로 교체하였다.

 

이종찬 참모총창은 비공개인 군사재판을 공개로 돌리고,방청객을 위한 스피커까지 설치하여 재판의 공정성을 알리려 했다. 재판 결과 방위군의 주요 간부 5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재판 후 이들을 공개처형하여 민심을 달래기에 힘썼다.하지만 이러한 책임자들에 대한 신속한 처형은 국방방위군의 비리에 대해 더 이상의 조사를 불가능하게 하였고, 몸통을 보호하기 위한 꼬리자르기가 아니었나 하는 의혹을 낳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보고 이승만 정권 수준에 크게 실망한 이시영은 부통령직을 사퇴하였다. 그리고 당시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신성모가 세력을 잃었고, 대신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여 인기가 급상승한 이기붕이 후계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 사건은 전쟁의 참화 속에 역사의 기억에서 묻혀버렸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내면서 정부의 실태조사와 보상 및 사과, 위령제, 유해발굴 등을 요구하였고,2002년 경북 영천에 국민방위군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재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by 레몬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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