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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파장
60대 남자가 기억하는 축구선수 유상철 본문
아침에 일어나니 슬픈 소식이 들립니다.
유상철 전 인천유나이티드 감독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입니다.
어느 언론에서는 ‘하늘의 별이 된 유상철’이라며 애도하고 있습니다.
유상철은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두 번째 골을 넣으며 국민을 열광시킵니다.
월드컵이 끝나고 히바우두(브라질), 미하엘 발라크(독일) 등과 대회 올스타 미드필더 부문에 뽑히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02 한일월드컵은 제게는 생애 가장 큰 축복중의 하나입니다.
한국 경기가 끝나면 밤을 새워가며 관전평을 쓸 정도였으니까요.
다음 글도 당시 제가 쓴 관전평 중의 하나입니다.
이을용 선수의 페널티킥 실축으로 온 국민이 그를 비난할 때 저는 그를 격려하는 글을 썼던 것이지요.
누가 이을용을 역적이라 하는가
지척의 거리에 둘은 서 있다. 불과 10.97미터의 거리다. 공이 골라인에 도착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0.4초다.
골키퍼가 공의 방향을 읽고 몸을 날리는데 걸리는 0.6초다.
0.4초 대 0.6초의 숨 막히는 접전. 그 접전의 순간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
숨소리도 차마 크게 낼 수 없다. 모두 애써 숨을 죽인다. 순간 모든 게 정지되어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그렇다. 적어도 그때만은 우리 모두 심연의 깊은 늪에 빠져있었다.
겁외장(劫外場), 우리는 그때 ‘시간 밖의 경기장’에 서 있었다.
골키퍼 브래드 프리덜이 골문에 선다. 잠시 멈칫거리다가 이내 자세를 가다듬는다.
흡사 레슬링의 기본자세를 보는 것 같다. 킥커 이을용은 10.97미터 끝 지점에 섰다. 다리가 가늘게 떨린다.
중심을 잡기 위해 발가락에 힘을 넣는다. 이을용은 입술을 질근 깨문다. 이 킥만 성공시키면 1:1이다.
이을용은 잠시 상념에 잠긴다. 잡초처럼 살아온 자신의 축구인생을 떠올린다.
‘빽’이 없어 대학마저 포기해야했던 아픈 과거가 떠오른다.
청소년 대표도, 올림픽 대표도 지내지 못한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축구 인생이 자꾸만 눈에 가물거린다.
‘실력 밖’의 외적인 요인에 의해 움직이는 한국축구가 싫어 떠밀리듯 그라운드를 떠나는 자신의 아픈 뒷모습이 자꾸만 클로즈업되어 나타난다.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았던 충북 제천의 나이트클럽에서의 웨이터생활,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이현창 감독과의 끈끈한 인연, 그 인연으로 다시 시작한 축구, 연상의 연인과의 결혼, 국가대표 발탁, 주전 이영표의 부상, 대타출전, 히딩크 감독의 신뢰…. 지금 이을용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이을용의 눈에는 골키퍼 브래드 프리덜만 보일뿐이다.
킥커 이을용은 페널티 지점에 발을 디딘다. 기다렸다는 듯 브래드 프리덜의 눈이 이을용의 눈과 다리에 모아진다.
주심의 휘슬이 짧게 울린다. 순간 이을용의 눈이 반짝 빛난다. 동시에 브래드 프리덜은 양팔을 활짝 펼친다.
페널티킥에 불가능은 없다. 적어도 확률적으로는 그렇다. 99% 이상의 성공률이 이를 증명한다.
페널티킥은 운이 아닌 과학이라는 주장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더욱이 1990년 월드컵 이후 지금까지 페널티킥에서 실축을 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불안하다. 뭔가 잘못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이을용은 애써 고개를 젓는다. 다 헛된 망상이다. 힘을 내자. 힘을 내야한다. 이을용은 천천히 자세를 취한다.
순간 골키퍼 프리덜이 오른쪽으로 상체를 미세하게 움직인다. 이을용은 잠시 혼돈에 빠진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골키퍼는 분명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왼쪽이다. 왼쪽이 비었다.
왼쪽이 저렇게 커 보이지 않는가. 이을용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며 강하게 왼쪽 골문을 향해 발을 날린다.
그러나 기다렸다는 듯 브래드 프리덜이 왼쪽으로 몸을 날린다. 동시에 짧은 외마디 소리가 들린다. 아, 속았다!
순간 물기 같은 게 이을용의 눈가에 배어나온다. 얼핏 보면 땀인 것 같고, 가까이서보면 눈물 같기도 하다.
지나친 기대 탓인가. 국민들의 실망은 컸다. 이을용의 페널티킥 실축에 국민들은 망연자실했다.
어찌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오는가. 급기야 국민들은 이을용에게 거친 욕설을 퍼부어댔다. 어떤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
“빼, 저 자식 빼란 말이야. 그 한 골이 어떤 골인데 실축을 하고 있어.”
옆에 있던 사람이 따라서 소리를 지른다.
“설기현도 빼. 도대체 저 자식은 뭐하는 놈이야. 저 좋은 찬스도 못 살리고. 도대체 지금이 몇 번째야.”
급기야 사람들은 한 입이 되어 외친다.
“히딩크는 선수기용을 잘못했다. 이럴 때는 분위기 반전을 위해서도 선수교체가 있어야 한다.”
어제의 충신이 오늘은 역적이 되는 순간이다.
명장 히딩크는 더 이상 명장이 아니었다. 융통성 없고 변화에 둔감한 고집스런 감독에 지나지 않았다.
선수 또한 마찬가지다. 이을용은 역적이 된지 오래고 설기현은 당장 교체되어야할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황선홍 역시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유상철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민들은 그 어느 선수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안정환이 동점골을 기록할 때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어제 한국팀은 열심히 싸웠다.
단지 골이 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비록 이을용이 페널티킥 실축을 했지만 한국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미국은 강호 포르투갈을 3:2로 이긴 막강한 팀이다. 이런 미국팀과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건 대단한 사건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대표팀을 비난하고 있다. 왜 이기지 못했냐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을 이기고 폴란드와 포르투갈이 비기거나 폴란드가 포르투갈을 이기면
오늘 우리는 16강을 확정짓는 것 아닌가. 국민들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다. 이제 우리 좀 더 냉정해지자. 이을용은 결코 한국 축구를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국 축구를 살려낸 일등공신이다. 비록 페널티킥 실축은 있었지만 그는 훌륭한 선수임에 틀림없다.
그의 어시스트가 없었다면 폴란드전에서의 영웅 황선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과의 경기에서 이을용의 도움이 없었다면 안정환의 골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탁월한 어시스트가 그나마 한국 축구를 지탱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 너무 이을용을 욕하지 말자. 그 역시 열심히 뛰었고 좋지 않은 결과에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한다. 우리 너무 골을 넣은 안정환에만 환호하지 말자.
축구는 11명이 뛰는 것이다. 그 중에는 영웅도 있고 본의 아니게 역적(?)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냉정을 찾아야한다. 태극전사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진했던 선수들에게 오히려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저기를 보라. 최강 포르투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하나 된 모습, 우리는 지금 하나 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16강이 바로 지척인데 예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유상철은 1994년 울산 현대 유니폼을 입고 프로생활을 시작합니다.
프로 첫해 K리그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됐고, 2002년엔 공격수로 베스트 11에 뽑힙니다.
1998년엔 K리그 득점왕(15골)까지 차지합니다.
2019년 5월에 부임한 인천은 유상철의 마지막 팀이 됐습니다.
당신 인천은 최하위권에 속했고 1부 잔류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막바지이던 그해 11월 췌장암 4기 진단을 받습니다.
그는 병마와 싸우며 1부 생존을 위해 마지막 투혼을 발휘합니다.
당시 인천의 '잔류 드라마'는 유 전 감독의 상황과 맞물려 극적으로 펼쳐집니다.
K리그 현장은 물론 일본에서도 경기장에 걸개가 걸리는 등 '응원 물결'이 일어납니다.
결국 인천은 2019시즌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경남 FC와 비겨 10위를 확정하며 1부 잔류를 결정짓습니다.
인천의 잔류가 결정된 뒤 창원축구센터 관중석에는
'남은 약속 하나도 꼭 지켜줘'라는 현수막이 걸리고 유상철은 이에 화답합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의지력을 갖고 힘들더라도 잘 이겨 내겠다“
그러나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오늘도 날씨가 좋습니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주문을 걸어봅니다.
정말 좋은 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by 국어사전 (이 글은 딴지일보게시판에 닉네임 '국어사전'님이 쓴 글을 허락을 받아 게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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