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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은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나?

레몬박기자 2016. 11. 2. 16:58

우리나라의 국정을 농단한 최태민과 최순실 그리고 그들의 꼭두각시가 된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가 밝혀졌다. 이 때문에 대통령 하야 내지 탄핵을 주장하는 시위가 잇따르고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층도 그녀의 행태를 비판하며,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 자리 숫자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를 지지했던 이들이 그녀를 대통령으로 세운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고 있다는 인터뷰가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렇게 나라를 백척간두의 위기에 몰아넣은 박근혜와 최태민 일가. 최태민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는 어떻게 얽혀졌는지, 언론에 보도된 내용으로 추적해보았다. (이 글은 진실의 길 2015.1.30.에 보도된 '박근혜 정윤회(정권)' 이라는 기사를 참조해 옮겼다.) 

 

 

1. 최태민은 추악한 난봉꾼, 사이비교주, 희대의 사기꾼으로 평생을 보냈다.

 

① 최태민은 1912년 5월5일생(1979년 당시 67세)으로 이름을 7개(최상훈, 최퇴운, 공해남, 최태민 등)나 사용하였다. 그는 황해도봉산군사리원에서 태어나 1942~1945년8월까지 황해도경 순사로 일제에 부역하였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② 최태민은 1949년 육군헌병대문관으로도 근무하였고, 1954년 머리를 깎고 사이비중이 되었으며, 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다. 그뒤 서울서대문구대현동에서 <영세교>를 만들어 교주로 활동하였다. 박근혜를 만난 후에는 목사안수를 받았다.(조선일보, 2012.8.22)

 

③ 70년대 들어 최태민은 서울과 대전 일대에서 난치병을 치료한다고 사이비종교행각을 벌였다. 불교·기독교·천도교를 종합하였다는 교리를 내세우고 방민이란 가명을 쓰면서 <원자경>, <칙사>, <태자마마> 등의 호칭을 자처하였다.(한겨레, 2012.7.17)

 

④ 1970년대말 중정(중앙정보부)은 최태민목사의 구국선교단 부패비리사실을 발표하였다. 이에 대하여 2012.8.22 조선일보는 <박근혜의 후원으로 구국봉사단(구국선교단의 후신)을 설립, 박근혜명의를 팔아 이권개입 및 불투명한 거액의 금품을 징수했다.>고 보도하였다.(시사IN, 2012.12.10)

 

⑤ 중정수사자료로 알려진 문건에는 최태민이 공사수주, 장군승진, 국회의원공천금품수수 및 차명계좌돈세탁 등 총44건 3억1755만규모의 비리항목이 적시되어 있다. 가령 봉사단공금을 빼돌려 차명계좌로 세탁, 승용차를 구매하고 중정복직, 공화당의원공천, 대령의 장성진급관련 금품수수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별도로 12건의 치정관계에 대한 조사도 포함되어 있다.(한겨레, 2012.7.17, 미디어투데이, 2012.8.22)

 

⑥ 2012년 당시 박근혜대통령후보는 시종일관 최태민의 비리의혹을 부인하였지만 10.26재판기록과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비리혐의를 부인하기 어렵다.(오마이뉴스, 2012.10.29)

 

➆ 1991년 박근혜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최태민이) 우리사회를 걱정하는 사람으로 느껴서 그분과 같이 일하게 됐다>고 말하였다. 최태민은 전두환신군부의 12·12쿠데타직후 사기 및 횡령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되어 징역1년6개월을 선고받았다.(간석출판사, <태자마마와유신공주>, 2012,5.31)

 

 

2. 박근혜와 최태민 그 수상한 관계

 

➀ 박근혜·최태민관계와 <사생아>풍문은 미국과 수구보수인사의 입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졌다.미국의 극비문서를 폭로한 위킬리크스에 따르면 지난 대통령선거기간 주남미대사관 버시바우대사는 <최태민목사는 젊은시절 박근혜후보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했던 사람>이라고 미정부에 보고하였다.(미디어오늘, 2014.10.15)

 

또한 최태민을 <남코리아의 라스푸틴>이라고 표현하였다. 라스푸틴은 시베리아의 사이비사제로서 제정러시아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때 황후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통제한 후 황제마저 장악, 농락하였던 자이다.(서울의소리, 2012.5.28)

 

풍문의 진원지는 대부분 박근혜의 동생 박근령, 조갑제, 중앙일보논설위원 김진 등이다.(한겨레, 2012.12.7)

 

➁ 정두언새누리당의원은 <최태민과 박근혜 관계를 낱낱이 드러내면요, 온국민이 경악할 것입니다. 그리고 박근혜를 많이 좋아했던 많은 분들이 밥도 못먹을 것입니다.>라고 폭로했다.(<손석희의시선집중>, 2007.8.17)

 

➂ 16년동안 대중앞에 나서지 않은 박근혜가 정계에 뛰어들자 박근혜의 이종사촌형부 김종필전자민련총재는 <최태민의 자식까지 있는 애가 무슨 정치냐?>고 말하였다. 노무현정권 당시에는 <사생아>와 관련된 보고서가 존재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선데이저널, 2012.7.15)

 

➃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전여의도연구소부소장은 <이회창씨의 아들병역문제보다 훨씬 큰 논란거리가 있다>며 사생활의혹을 제기하였다.(뷰스앤뉴스, 2012.7.16)

<박전위원장이 낳은 자식이 올해 30살정도이며 일본에 살며…>라든가 <DNA검사> 운운한 대목 등 관련내용의 증언자는 김현철로 나오지만 사실상 김영삼전대통령이라고 알려졌다.(진실의길, 2012.7.18)

 

➄ 조갑제는 2015.10 월간조선칼럼을 통하여 <박근혜대표가 1970년대후반기에 최태민이란 이상한 사람을 구국봉사단총재로 썼다가 최씨가 수많은 스캔들을 일으켜도 그를 끝까지 감쌌던 적이 있다. 박대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고 말하였다.(미디어투데이, 2014.12.2)

 

➅ 2007년대선 당시 한나라당경선에서 이명박후보측 박근혜후보검증팀 핵심인사는 <박근혜에게 박지만은 가족이 아니라 애물단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최태민과 최순실, 정윤회가 가족이라고 보면 된다.>며 <우리가 확보한 증언이나 자료내용은 너무나 쇼킹한 내용이라서 당시엔 MB까지 보고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기록은 남겨뒀다>고 주장하였다.(주간경향, 2014.12.16)

 

 

3. 박근혜에게 접근한 최태민

 

육영수피살후 최태민을 만난 박근혜는 그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➀ 불교·기독교·천주교를 복합하여 만든 영세계의 교리 <영혼합일법>을 주장한 최태민은 1975년 2월말경 박근혜에게 3번에 걸쳐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➁ <김형욱회고록>에 따르면 1974년 육영수사망직후 최태민은 <어머니 목소리가 듣고싶을때 나를 통하면 항상 들을 수 있다. 육여사가 꿈에 나타나 <내딸이 우매해 아무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면서 <이런 뜻을 전해달라>고 했다.>고 편지를 썼다.(허핑턴포스트코리아, 2014.12.2)

 

➂ 박근혜 당시 후보는 2007년 후보검증청문회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에 수많은 위로 편지와 전화를 받았다. 그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와닿고 만나서 얘기듣고 싶을 때 만났다. 최씨는 그렇게 해서 만난 몇분중 한분>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어머니가 돌아가신뒤 힘들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분>이라고 하였다. 1975.3.6 박근혜는 최태민을 청와대까지 불러 대화를 나누었다. (조선일보, 2012.8.22, 한겨레, 2012.7.17)

 

➃ 박근혜를 처음 만난 최태민은 <구국선교>를 역설하였고 박근혜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심복을 중심으로 <대한구국선교회>를 설립하고 총재로 취임하였다. 명예총재는 박근혜가 맡았다. 1976.12.10 구국봉사단으로, 1979.5.1 새마음봉사단으로 개칭되었다.(프레스바이플, 2012.03.29)

 

➄ 최태민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5.5.11 신도 5000여명을 파주임진각에 모아 박정희대통령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을 때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박근혜는 이후 1주일에 2~3차례 그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석하였다.(동아일보, 2012.9.24)

 

➅ 80년 대 후반 전두환독재가 끝나자 박근혜는 대외활동을 재개하며 최태민과 함께 새마음봉사단의 후신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다.(한겨레, 2012.7.17)

최태민은 1990년 육영재단분규건으로 공식석상에서 물러날때까지 근15년동안 구국여성봉사단, 박정희·육영수기념사업회. 근화봉사단 등 박근혜와 관련된 일에 빠짐없이 등장하였다.(한겨레, 2007.6.18)

 

➆ 최태민과 그의 자녀들의 거주지가 박근혜의 자택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근혜의 삼성동집에서 500m떨어진 곳에 최태민이 살았고 정윤회·최순실부부가 소유했던 역삼동건물도 이와 멀지 않은 곳이다.(한겨레, 2012.7.17)

 

➇ 최태민은 1994.5.1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으나 이해 7월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중앙일보에 실린 부음기사에 <최씨는 최근까지 근혜씨의 생활비를 대주며 재산관리인 행세를 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고 적혀있다.(한겨레, 2012.7.17)

 

4. 박근혜를 등에 업은 최태민 그리고 비리

 

박근혜의 후광을 업은 최태민은 각종 이권·인사에 개입하여 막대한 재산을 끌어모았다. 최태민의 비리사실·여자관계·이권개입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된 <최태민보고서>가 1979 중정에 의하여 작성되었다.(오마이뉴스, 2012.10.29)

 

➀ 최태민은 사망전까지 육영수사망이후 퍼스트레이디역할을 한 박근혜를 등에 업고 끊임없이 사기·횡령·권력형이권개입을 저질렀다.(오마이뉴스, 2012.10.23)

 

➁ 선친 박정희, 동생 박근령·박지만은 박근혜·최태민관계를 심각히 우려한 것이 드러나며 둘의 관계를 반증하여 준다. 박정희는 20대의 딸이 그에게 현혹되었다고 보고 중정을 통하여 그를 수사하라고 지시하였다.(한겨레, 2012.7.17, 머니투데이, 2014.7.14)

 

➂ 1990.8 박근령(애초 근영, 1994년 서영에서 2004년 다시 개명)과 박지만은 <사기꾼 최태민을 엄벌해 최씨에게 포위당해 있는 언니 박씨를 국가원수유족의 보호차원에서 구출해 달라>고 청와대민정수석실에 탄원서를 전달하였다. 당시 노태우대통령은 청와대하명사건을 담당하는 <사직동팀>에 최태민내사를 지시하였다.(오마이뉴스, 2012.10.23)

 

수사기록에 따르면 형식상 모든 업무는 박근혜가 관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비공식고문격으로 전권을 위임받아 행정부·정계·재계·언론계 등 각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한겨레, 2012.7.17)

 

➃ 2007년대선후보경선 당시 최태민의 의붓아들(5번째부인의 전남편아들) 조순제는 수백억원대 재산가로 알려진 최태민의 친인척들이 박근혜와 최태민이 만나기 전까지 가난했고 <박전대표는 최목사유족의 재산형성과정을 모를 리가 없다>고 주장하였다.(오마이뉴스, 2012.10.23)

 





by 레몬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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