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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박기자의 카메라여행

서울 북촌 백인제가옥 친일매국노가 만든 집이 서울문화재가 되기까지 본문

국내여행

서울 북촌 백인제가옥 친일매국노가 만든 집이 서울문화재가 되기까지

레몬박기자 2019.01.31 12:35


서울에서 꽤 오래 살았고, 또 서울을 떠나서도 서울을 자주 왔지만 북촌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언론과 블로그 등에 하도 북촌북촌 하길래 도대체 어떤 곳인가 싶은 호기심이 발동하기도 했고 

나이가 좀 들다보니 이젠 휘황찬란한 겉 멋이 든 것보다 옛 것에 대한 추억과 소중함이 더 살아나기 때문일 것이다. 

북촌을 찾으니 생각보다 넓다. 길가다 보니 손병희 선생 생가터가 있는 표지가 있어 

그 골목길을 타고 올라가보니 멋진 한옥이 한 채 보인다. 

대문 현판을 보니 백인제 가옥이라고 적혀 있고,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여 나도 자연스레 계단을 올라섰다. 




입구에 있는 백인제가옥에 대한 설명을 보니 꽤나 유서가 깊은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백인제 가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가회동 백인제 가옥(嘉會洞 白麟濟 家屋)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7길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가옥이다. 1977년 3월 17일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1977년 민속자료로 등재될 때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가 소유하고 있어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백인제가옥은 1913년 한상룡이 세운 집으로 압록강 흑송을 가져다 지었다고 전한다.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1906년 가회동으로 이주하였으며 이후 몇 년에 걸쳐 주변의 작은 가옥 12채를 사들여 집터를 마련하고 1913년 6월 경성부 가회정(町) 93번지(현 종로구 가회동 93-1번지)에 새 가옥을 준공했다. 이때문에 문화재 전문가 황평우는 이 집의 이름을 한상룡 가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우리 문화재에 친일매국노의 이름을 붙일 순 없는 것 아닌가?  



행랑채 가옥 입구에 들어서면 행랑채가 있다. 방크기를 보면 상당히 작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적당한 크기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많이 커진 것이겠지.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가옥은 안국동 윤보선가와 함께 북촌의 대규모 한옥을 대표한다. 일제강점기의 한옥으로 근대 한옥 양식의 특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위치에 세워졌다.

건축 자재로 압록강의 흑송을 들였다고 한다. 한옥의 재료로서 흑송이 쓰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07년 경성박람회 때 흑송 목재가 소개된 바 있다. 실재 흑송을 사들여 썼는 지, 아니면 당시 헐리고 있던 경복궁의 목재를 썼는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방공호 폭격에 대비한 것인지 몰라도 앞마당에 이런 방공호가 있다.



백인제 가옥은 한국 중부 지방 한옥 배치를 기본으로 하면서 서양과 일본의 건축 요소를 받아들인 집이다.

크게 행랑채, 안채,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통적인 서울지방 상류층 주택과 달리 사랑채과 안채를 이어 붙여 지었다. 높은 솟을 대문이 입구에 놓이고 대문 좌우로 광과 부엌이 있으며, 대문을 들어서면 행랑채가 안뜰과 사랑 마당을 구분하고 있다. 사랑채에는 4칸의 방과 대청을 놓았으며 긴 툇마루가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앞뒤로 퇴칸을 두었고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을 일자로 배치하였다. 별당은 뒤뜰 북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한옥으로는 특이하게 사랑채에 2층을 두었는데 한상룡은 2층을 다다미방으로 꾸몄다. 방앞으로는 한옥의 일반적인 양식인 쪽마루 대신 유리창을 단 문을 달고 그 안쪽으로 일본식 복도를 두었다. 이러한 요소는 한상룡의 중요한 손님인 일본 관료나 기업인들에게 일본화된 본인을 보여주는 도구로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서양 건축 요소인 붉은 벽돌도 함께 썼으며 안채의 부엌 위에도 작은 다락방이 있다.





한상룡은 이 집에 1928년까지 거주하였고 1935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 조선중앙일보 부사장을 역임한 최선익이 사들였다. 개성 출신의 부호였던 최선익은 1932년 27세의 나이로 조선중앙일보를 인수하고 민족운동가인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여 민족 언론사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이후 1944년 외과 의사이자 흥사단 활동가였던 백인제가 이 집을 인수하였다. 백인제는 1950년 9월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고], 이후 백인제의 부인 최경진과 자식들이 계속하여 거주하였다. 1988년 집의 소유권은 아들 백낙조에게 이전되었으며 2009년 서울특별시가 매입하였다. 2015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어릴 때 내가 사는 동네에도 이곳과 비슷한 규모의 한옥이 있었고, 그 집을 내 집처럼 들락거려서인지 상당히 친숙하다. 마치 오래전 떠났던 집에 돌아온 그런 느낌이었다. 한옥은 그 구조상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음도 몸도 그래서 내 집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다. 잘 왔다.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by 레몬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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