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공감과 파장

엘리베이터에서 건낸 인사 이것도 성희롱? 본문

사진칼럼

엘리베이터에서 건낸 인사 이것도 성희롱?

레몬박기자 2021. 6. 29. 13:31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열무에다 밥을 비벼먹자고 합니다.
열무가 싱싱한 것 같아 한단에 3000원을 주고 사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김치를 담가볼까도 생각했는데 양이 적어 비벼먹기로 했다면서 강된장을 끓이기 시작합니다.

커다란 양푼에는 열무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저 많은 것을 어떻게 다 먹을 거냐고 하자 아내가 웃으면서 숨이 죽으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 아내의 말대로 열무에 펄펄 끓는 강된장을 부으니 양이 몇 배로 줄어듭니다.

 


 
열무비빔밥을 만드는 것은 제 몫입니다.
따끈따끈한 보리밥을 열무 위에 집어넣고는 고추장을 두세 숟갈 섞어 비비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열무로 밥을 비빌 때는 주의해야할 게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반드시 젓가락을 사용해서 비벼야 한다는 것인데

숟가락으로 비비게 되면 열무가 으깨져서 풀냄새가 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양손에 젓가락을 하나씩 들고 두루두루 섞기를 반복했는데 

마치 자장면을 비비는 듯합니다.

 


아내가 참기름은 넣었느냐고 물었고 넣지 않았다고 하자 

참기름이 빠져서는 안 된다면서 숟가락이 철철 넘치도록 따라가지고는 열무비빔밥에 넣습니다.

 
"열무는 여름에 좋대요. 열이란 말이 더울 열(熱)을 말한대요. 더위를 물리쳐준다고 해서 '열무'라고 했다나 봐요."

"내가 알기로는 그게 아니던데."

"그래요?"

"여름에 좋은 음식이라는 건 맞는데… 백과사전에는 '어린무' 또는 '여린무'라고 나오거든."

"뜻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지."

"당신 말이 맞아. 밥이나 맛있게 먹자고."

 



우리는 밥을 먹기 시작합니다.
열무비빔밥은 이번에도 저를 배신하지 않습니다.
입에 착착 달라붙는 것이 세상에 이런 맛이 따로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양 볼이 미어터질 정도로 밥을 밀어 넣은 다음 우악스럽게 씹어댑니다.
밥풀이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나를 보며 아내가 좀 점잖게 먹으라고 합니다.
저는 비빔밥은 서민 음식이고 나 또한 그에 속하는 사람이라서 어쩔 수 없노라고 합니다.

사실 비빔밥이 서민 음식인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어느 책에 보니 그런 내용이 나온 것 같기도 해서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저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앞집 아주머니에 대해서 말합니다.

"아침에 승강기에서 앞집 아줌마를 만났는데 10년 전하고 얼굴이 똑같더라고."

그러면서 아침에 승강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승강기 안에는 공교롭게도 저하고 그녀 둘뿐입니다.
여러 명이 타고 있어도 어색할 터인데 둘뿐이라서 그 어색함은 더했습니다.

저는 뒷짐을 진채 정면만 응시합니다.
출입문에 부착된 거울에 그녀의 얼굴이 비칩니다.
그런데 제가 이사 올 때인 10여 년 전과 얼굴이 똑같습니다.
자그마한 몸매에 얼굴이 작아서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때 작은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10년 전에 입주할 때와 얼굴이 똑같습니다.”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혔습니다.
거기에서 그만 멈춰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한발 더 나갔습니다.
 
“몸매도 여전하십니다.”

순간 그녀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차 싶었습니다.
이것도 성희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던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입니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더니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안도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몇 마디 던졌다가 하마터면 성희롱으로 몰릴 뻔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도 제게 "선생님도 10년 전과 똑같아요. 몸이 약간 불긴 했지만요."라는 말을 하긴 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마치자 아내가 책망합니다.  

"그러게 왜 남의 집 여자에게 말을 걸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큰애가 한마디 합니다.

 "어제 뉴스에 국민의힘 대변인을 뽑는 '토론 배틀'에서 16강까지 갔었던 한 참가자가 과거 성희롱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고 있대요. 아빠도 까닥 잘못 했으면 뉴스에 나올 뻔 했네“

“하하하!”

“호호호!”

 


 

아이의 말에 가족 모두가 웃습니다.

양푼에 담긴 열무비빔밥이 너무 많아서 언제 다 먹을까 걱정했는데 벌써 바닥을 보입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냅니다.
달착지근한 아이스크림이 후텁지근한 저녁을 달래줍니다.

 


 

오늘도 날씨가 좋습니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주문을 걸어봅니다.
정말 좋은 일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by 국어사전 (이 글은 딴지일보게시판에 닉네임 '국어사전'님이 쓴 글을 허락을 받아 게시합니다.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