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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여행, 비버리힐즈 로데오 거리에서 본 부가티의 위용

레몬박기자 2011. 3. 15. 05:30


이제 비버리힐즈의 좀 더 깊은 곳을 들어가보겠습니다. 영화 귀여운 여인에서 보았던 그 거리, 바로 로데오 거리에 들어섰습니다. 정말 영화에서 본 그 대로더군요. 그런데 거리 한 켠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어서 뭔가 했더니 "부가티"와 "페라리"가 한 대씩 거리에 주차되어 있네요. 물어보니 이렇게 한 번씩 차를 거리에 세워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킨다고 합니다. 말로만 듣던 그 부가티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부가티가 어떤 차인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아주 친절하고 자세하게 소개해주는 군요.





부가티는 자동차를 예술품의 경지로 끌어올린 천재 엔지니어인 부가티에 의해 만들어 졌다. 그는 1881년 9월 15일 이탈리아 밀란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가티가는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명문가로 에토레의 부친 카르 르 부가티도 회화는 물론 가구나 건축에도 조예가 깊은 예술가였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듯이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프랑스란 곳은 좋은 예술적 환경을 가질 수 있는 혜택 받은 나라로 알려졌기에 부가티 가족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환경을 향유 시키고자 프랑스로 이사를 갔다. 이것이 부가티가 프랑 스차로 다시 말하자면 그랑프리 부가티가 프랑스 적인 프렌치 블루의 칼라로 색칠해진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이후 자동차 제작기술을 익힌 부가티는 1901년 디트리히(Dietrich)모델을 만들었으며, 1909년 프랑스 알자스지방의 몰스하임에서 부가티 자동차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는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신경썼을 뿐 아니라 부품 하나 하나에 예술적인 감각을 불어 넣었다.  부가티는 평소 "만약 사각형 피스톤이 아름답다면 서슴없이 원형을 버리고 이를 따르겠다"고 말할 만큼 예술적 감각을 강조 하였다. 그가 처음 사용한 말발굽 형태의 라디에이터 그릴이 바로 부가티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예술적인 안목 못지 않게 기술적인 방면에서도 뛰어나 그가 만든 TYPE 35 경주차는 20년대 유럽 레이스를 휩쓸며 부가티의 명성을 드 높혔다. 그리고 부가티가 만든 가장 유명한 모델은 역시 30년대초 단지 6대만 만든 "TYPE 41 르와이얄"로서, 아직도 인류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차, 가장 값어치 있는 차로 평가 받고 있다.







프랑스로 건너가 태어난 차로서의 최후 모델은 콜롬보가 설계한 그랑프리 T251 이지만 마지막 시판모델로는 에또레가 서거한 뒤 생산된 T101이다. 부가티의 이 름을 가진 모든 차는 그것이 어린이용 전기자동차라 해도 반드시 스타일 번호를 갖고 있다. 왕실 귀족의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베이비 부가티인 T52도 바로 이런류의 일종이다. 단 6대만이 완성차로 탄생된 르와이얄은 T41로 분류되었다. 스타일 넘버는 13이라는 숫자에서 시작되어 후반부에는 59, 64, 68, 73, 101, 251 처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흐름으로 볼 때 새 로 제작된 부가티가 110으로 시작된 것은 최초의 시판 모델인 101로부터의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EB110과 EB112는 물론 에또레 부가티가 태어난 1881년을 기점으로 하여 각각 110년과 112년 뒤에 발표된 것이다.







부가티의 가치를 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가령 예를 들어 1천 500만대 이상 생산되었다는 T형 포드는 이미 대부분이 고철이 되고도 남았으며, 극히 일부 만이 오늘날의 역사적 증인으로서의 가치성 만을 지닌 채 남아있을 뿐이다. 이와는 반대로 총 7천 500대 정도 밖에는 생산되지 않은 부가티의 대부분은 지금도 건재하게 남아있고, 마치 예술품과도 같은 문화유산품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문명의 이기로서만이 아닌 수퍼카로서 부가티의 또 다른 측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노력파인 부가티자동차의 설립자 에또레 부가티는 "르와이얄"을 출시하던 시점에 경제공황이라는 커다란 벽에 부딪혔고, 1939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등 생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안은 채 1947년 8월 21일 실의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편 또 다른 수퍼카 창시자인 엔초 페라리는 같은 해인 1947년에 페라리의 첫 모델을 세상에 내놓았다. 수퍼카의 대부인 부가티와 페라리는 공교롭게도 장 부가티와 디노 페라리라는 아들을 어려서 각각 잃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자 후계자이어야 할 아들을 잃은 아픔을 두 사람 모두 공통적으로 갖게 되었다.










한편 생전에 완벽하지 못한 브레이크에 대한 지적이 있었을 때 부가티는 "나는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라고 열을 올렸다는 일화가 있었던 것을 볼 때, 이와 같은 경우라면 페라리 역시도 충분히 이런 말을 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페라리가 피아트 산하로 들어갔고 이태리 수퍼카의 거장 엔초 페라리도 세상을 떠났지만 순수한 모양의 에또레 부가티가 이태리에서 재현 됐던 것은 흥미를 끌어당기는 대목이다.
1991년 부가티는 EB110이라는 모델을 발표하면서 이태리 사업가 로마노 아르티올리에 의해 부활되었지만 1996년에 파산해 지금은 폴크스바겐이 새주인 되었다.







자동차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작품.. 제 눈으로 보았고 또 만져보았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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